본문 바로가기

별피, 쓰다

그를 위해

그런 이야기다.

근무 중.
어르신이 오셔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경해' 책이 있는지 물었다.
없었다.
하지만 예약 주문은 가능하다고 했다.
예약 주문을 하고 도서를 택배로 받고 싶다고 했다. 멀리서 오셨다고 했다.
예약 카드에 성함, 연락처, 주소(경기도 산골짜기에서 오신 듯했다)를 쓰고
선결제를 하고 가셨다.

도서를 주문하려고 컴퓨터 창을 여는 순간,
아차.
곧 추석이라 택배가 오늘까지였다.
근데 책은 내일 온다.
내일은 택배를 보낼 수 없다.
근데 책은 내이 온다.
내일은 택배를 보낼 수 없다!

x 됐다 싶어 전화로 자초 지명을 설명하기 위해 예약 카드를 봤다.
번호를 눌렀다.
?
없는 번호란다.
전화번호를 유심히 봤다.
이런.
전화번호 뒷자리 하나가 없었다.
010-****-***?

정말 x 됐다 싶었다.

혹시 전에 예약을 또 하신 적이 있나 싶어
전산으로 고객 예약 리스트를 봤다.
없었다.

혹시 회원등록을 하신 분인가 싶어
전산으로 회원 목록을 살폈다.
없었다.

정말 정말 x 됐다.

여러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추석이 끝나고 보낸다
중간에 전화가 오면 솔직히 설명드린다
아니면 거짓말로 보냈다고 한다.
아니면 다른 서점에서 책을 사서 보내드린다.

다른 서점에서 책을 사서 보낸다, 라는 계획을 선택했다.

주변 서점에 재고를 살폈다.

없다.
없다.
있다.

딱 한 곳에 책이 있었다.

그곳으로 갔다.
내 사비로 책을 샀다.
원래 계획은 책을 사서 일단 보내고 서점에 책이 들어오면 그 책을 가져가서 반품하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책 계산을 할 때 책 밑에 도장을 찍으려고 하길래 찍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럼 안에라도 찍어 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싫다고 했다. 선물할 거라고 했다.

그럼 교환 반품이 안된다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럼 영수증을 확인시켜주고 '찢어버리겠다'라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사실 '네 찢어버리세요'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었지만 반품하려고 했던 계획이 양심에 찔려 그러진 못했다.

사비로 책을 사서 포장을 하고 무사히 택배를 보냈다.

그리고 어르신이 계산하고 간 책이 들어오면 내가 가져하기에
내 이름으로 고객 예약 카드를 다시 썼다.

입사 이후로 역대급 친절이고 성의였다.
그분에겐 내 이름도 알려드렸다(입사 이후로 이번이 2번째다. 첫 번째는 웬 미친년.)

왜 이렇게 그분에게 성의를 표시했냐고?

그 어르신, 자연인 포스를 풍겼다.
처음에 특이한 어르신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계산을 하면서
자기가 원래 심리학 교수인데 은퇴를 하고 불교에 관심이 생겨 공부 중이라고 했다.
그러시냐고 했다.
계산이 끝나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매장 전화번호를 적어드렸다.
그리고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적어 드렸다(나답지 않게)
그러더니 갑자기 사과를 했다.
'이름'이 아니라 '성함'이라고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셨다.
아, 이런 어른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추석 연휴가 다가와서인지 평소보다 나이 많은 무례한 손님이 많아 살짝 너덜너덜해진 뒤였기에
더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요즘 어른들은 대접받기 만을 원하는데 어른들도 젊은 사람들을 대접해줘야 대접받을 수 있다고 했다,
대접받기만을 원하면 안 된다고 했다.

모두 자기가 생각한 방향대로 흐른다고 했다.

손님들과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나지만
순간
'네, 정말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습니다'라고 했다.
정말, 그런 기분이었다.

만약 이런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사비를 털어, 내 영수증을 찢어버리겠다는 서점에 가서 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참, 값진 대접을 받았기에 내가 보인 성의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손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그만뒀다. 투머치 하기에.

이런 이야기다.


번외+) 어르신이 교수님이라는 것을 정보로 구글에 ***교수님이라고 쳐봤다.
블로그가 나왔다. 전화번호도 나왔다.
전화번호...
전화번호....
뒷자리 하나가 빠져서 연락을 못해던 그 전화번호....^_^.....

'별피, 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과 마음 에너지  (0) 2019.09.12
남겨진 사람의.  (0) 2019.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