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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

책 '밥하기 보다 쉬운 글쓰기' 중 '개미와 베짱이'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우화, 게으른 베짱이와 부지런한 개미에 관한 글인데 작가의 '딴지'에 통쾌하고 웃고 말았다.

작가는 개미와 베짱이가 '부지런하게 살지 않으면 베짱이처럼 될 것이다'라는 '교훈적인 협박'을 담고 있다고 말하며, 사실 추운 겨울날 베짱이를 내쫓은 그 개미들은 부지런하지만 인정머리 하나 없는 '왕구두쇠'들이 아니냐며 딴지를 건다. 이어서 작가는 베짱이는 여름날 그늘에서 빈둥거린 게 아니라 주장한다. 베짱이는 빈둥거린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한 것이며 빈둥거리기는커녕 오히려 개미들의 노동이 권태롭지 않게 노동요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개미들은 베짱이에게 당연히 먹을 것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겨울날 베짱이를 내쫓은 개미들이 보기 안 좋았는지 '개미와 베짱이' 결말은 두개로 나뉘는 듯하다. 겨울에 베짱이에게 음식을 나눠주지 않은 구두쇠 개미들과 음식을 나눠준 개미들 결말로. 내가 읽었던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는 어떤 개미를 만났던가. 아마 음식을 나눠준 개미 결말이었던 것 같은데 작가는 음식을 나눠준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다시 한번 딴지를 건다. 개미들은 베짱이를 '환호성'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왜? 파티에는 음악이 있어야 하니깐!(개미들이 파티를 했는지 오래돼서 기억은 안 나지만, 긴 겨울을 날 때 음악이 있으면 좋으니깐) 그러니 개미들은 음악에 능한 베짱이를 환호성으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베짱이는 음악을 연주하고 개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봄이 올 때까지 즐겁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겨울 동안 새로운 곡을 작곡한 베짱이는 여름날 개미들에게 새로운 노동요를 들려주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결말이라야 작가님의 딴지가 멈추겠지. 그러나 '개미와 베짱이'는 이런 새롭고 통쾌한 각색을 거쳐도 요즘 시대에서는 코웃음을 많이 받을 것이다. 게을러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뼈빠지게, 부지런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 아닌가. '개미와 베짱이' 뿐 아니라 많은 우화들이 평면적인 이야기에 생명력을 점점 잃어간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베짱이의 음악을 빈둥거림이 아니라 재능으로, 개미와는 '다른' 부지런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가진 게 있지만 나누지 않는(왕구두쇠 결말일 경우) 개미들의 옹졸함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하는 개미들은 무조건 착실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선으로만, 노래하는 베짱이는 빈둥거리고 겨울에 구걸하러 다니는 악으로 보는 평면적인 이야기가 점차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내가 이런 평면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니. 혹시 내가 평면적인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면 이 '개미와 베짱이'의 역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다. 입체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고 오래오래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개미들의 선한 마음을 미리 알고 이용할 작정으로 여름에 게으름 피우고 겨울에 최대한 불쌍한 낯짝으로 개미들의 동정심을 유발해 먹을 것을 얻은 뒤 뒤돌아 음흉한 미소를 짓는 베짱이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 베짱이의 이런 음흉함을 간파하고 있던 개미는 나눠 준 먹을 것에 설사약을 타는데...'

 

마린블루스의 개미와 베짱이

개미군 우리 힘내보아요. 베짱이에게 설사약을 주어요.